최종옥희망나눔

청계천의 역사

최 시몬 2006. 12. 25. 13:27

 

 

                               [20세기 초 청계천 수포교의 모습]

 

 

청계천은 중랑천의 제1지류인 지방1급하천이다.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과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유로 연장 10.92㎞의 도시하천으로 무교동·광교·장교·수표교 등을 지나서 흘러 내려오는 성북천과 정릉천이 차례로 합류하고,
마장동 견인이동차보관소를 지나 중랑천 본류의 서쪽으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청계천 유역내의 빗물과 생활하수를 전량 하수관거를 통해 집수하여 배수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청계천 유역은 총 유역면적 50.96㎢로 서울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지금까지 600여년 이상 우리 나라의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권을 담당해 온 유서 깊은 지역이다.

청계천과 그지류의 유역을 포함하고 있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한강 이북의 성북구·강북구·동대문구·성동구·중구·종로구의 총 6개 구에 달한다.

일찍부터 서울의 내사산인 북악·낙산·남산·인왕산의 산마루를 연결한 도성 안, 곧 그에 딸린 숭례문(남대문)·흥인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숙청문(숙정문) 등 네 대문 안인 도심지 한가운데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시내를 개천(開川)이라 하였다.

 

    

   [1920년대 청계천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장면]


이 개천에 대하여 『동국여지비고』 산천조에는 백악·인왕산·목멱산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개울물이 합하여 동으로 흘러 도성의 복판을 가로질러 세 곳 수문(水門)을 빠져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라고 하였고, 『한경지략』 산천조에도 우리 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서울의 개천만은 동으로 흘러 나가므로 사람들이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한다.

개성의 시냇물을 개천이라고 한 것을 한성에서도 그 이름 그대로 옮긴 듯 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청계천 즉 개천은 도성 한 복판을 서울 다른 하천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 서울의 명당수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청계천은 조선이 개창된 이후 도성을 건설하면서부터 서울의 주 배수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태종 때 이미 제방축조 및 개천 바닥 준설공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세종 때에도 청계천의 하천환경 악화로 준설을 실시하고, 오염물 투기를 금지시켰다.

이후 영조 때에 대규모 준설 및 석축공사를 실시하였으며 고종 때까지 계속 준설공사를 실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울의 주요 배수간선의 역할을 수행한 청계천은 홍수예방을 위해 1942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대규모 준설공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그후 태평양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광복을 맞이하고 나서 1958년부터 본격적인 청계천 복개공사가 추진되었다. 1984년에는 청계천 양안에 차집관거를 설치하였고, 이후 1992년에 하수도 재정비사업을 실시한 바 있다.

 

                                    [1890년대 청계천 풍습도]

(1) 한성부시대


<한성부시대청계천>

조선 건국 당시 서울은 지형의 기복이 심한 산간 분지였다. 백악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남으로 흐르고,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북으로 흘러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도성을 관통하여 흐르는 오늘날의 청계천과 합류하여 오간수교를 거쳐 성 밖으로 흘러갔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때는 단순하게 개천(開川)으로 불리웠으며, 모든 공문서에도 개천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선하천령(朝鮮河川令)이 제정되면서 상류의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청계천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청계천의 개수공사가 실시되기 이전까지는 제방시설의 미비로 강수량이 많을때는 물이 범람하여 침수가 극심하고, 빈민들의 불결한 생활로 전염병의 온상지가 되기도 하였다.

태종 11년(1411) 말에 개천의 대공사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에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여 다음 해 정월부터 공사를 착공하였다. 군사들과 충청·강원·전라도 일대에서 동원한 사람들 및 부근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약 52,800여명의 인원을 동원, 만 1개월만에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혔으며, 돌과 나무로 제방을 쌓아 도읍지로서의 환경조성을 새롭게 하였다.

이후 330여년 간 도성내의 유일무이한 하수로인 청계천은 개수되지 않고 방치되어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물길에 쓸려 내려와 매립된 토사가 거의 양안 도로와 수평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장마 때는 오염된 물이 주택가로 범람하여 청계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명과 가옥의 피해가 극에 달하였다. 나아가 영세민들이 시체를 개천에 버려 시신이 그대로 부패하여 악취가 멀리까지 이르는 등 위생상으로도 불결하였다.

영조 36년(1760) 2월 18일 개천에 대한 준설공사를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 때의 공사는 규모면에서나 비용면에서 조선이 창건 된 이후 가장 큰 준설공사였다. 당시에 인부 5만명에 평민 15만명이 동원되어 돈 35,000여냥, 백미 3,300여석의 큰 자금을 들여 57일간 공사를 실시하여 같은 해 4월 15일 완성하였다.

이때 장기간에 걸쳐 수해의 참화를 겪고 불결함을 지켜보았던 도성의 주민들도 1만여명이 자원하여 참석하였고, 양반들도 일꾼들을 스스로 보내왔으며, 경기도 주민과 개창된 이래 도성의 축조와 궁궐 건립 이후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이 공사가 완료된 이후 영조는 상설기관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개천의 개수와 준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청계천변에 가설된 수표교의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平) 이라는 글자를 각인하여 차후 개천을 준설할 때는 반드시 이 글자가 완전히 보이도록 하였다. 홍수가 발생할 때 이 글자가 보이지 않으면 인근의 주민들을 대피시켜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기여하였다.

준설공사 이후에는 석축공사를 시작하여 13년만인 영조 49년(1773) 8월 6일 준공을 보았는데 이 공사는 조선 건국 초기 도성 축조에 비유될 만한 일대 토목공사였다. 이 공사에서 특이할 만한 일은 그 당시의 토목기술로서 상석(床石)을 시공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1923년 일본인들이 석축을 개수할 때 발견하였다.

이 석축공사가 완성된 이후에 준천사에서는 목편을 세워 매년 보수를 단행하였으나 견디지 못하였으며, 개천 양 둑에 수양버들을 심어 호안을 시도하기도 했다.

영조 때의 청계천 개수공사는 호안과 준설에 역점을 두어 실시되었으며 아울러 유로 변경공사도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공사가 실시되기 22년 전인 영조 27년(1751) 제작된 도성도에는 개천이 자연유세에 따라 다소의 굴절이 있었으나 본 석축공사 이후의 각종 도면에는 직류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순조 33년(1833) 2월 22일에 다시 준설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이해는 마침 흉년으로 민폐를 피하여 각 군영에서 공사를 담당하였다. 철종 및 고종시대의 준설상황을 보면 철종 7년(1856)에 경복궁 앞을 흐르는 물줄기를 개축하였으며, 고종 26년(1889)에 또 다시 왕명으로 준설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때는 준천사가 폐지된 후이므로 한성의 별영(別營)으로 공사진행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 정식으로 한성부에 준천의 업무가 이관되었으며, 1897년에는 마차회사(馬車會社)가 설립되어 준천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1908년 한성부의 주관하에 마지막으로 준천이 실시된 뒤 일제강점기로 넘어간다.

한성부 시대의 하수시설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성 밖으로 배출시키기 위하여 동대문 근처에 세 군데의 수구를 설치하였다. 첫째는 청계천 본류의 물을 배출하기 위하여 설치된 다섯 개의 수문을 가지고 있는 아치형 교각인 오간수다리이고, 둘째는 남산 동쪽의 장충단 방면에서 동대문운동장의 북서쪽으로 유입하는 물을 처리하기 위해 을지로6가 18번지 부근에 있었던 이간수다리이며, 셋째는 동대문 바로 남쪽 부분에 설치된 수문이다. 오간수다리는 광무 11년(1908) 당시 토목국장이었던 유맹(劉猛)이 청계천을 흘러 내려오는 토사와 물의 흐름을 원할하게 한다는 미명하에 헐어버려 찾아볼 수가 없다. 개천의 준설공사에 의해 발생하는 흙은 오간수문 근처에 쌓아 두어 산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조산동(造山洞:일본인이 방산동이라 개칭)이란 명칭까지 생겼다. 또한 현 방산동·주교동·산림동 등지에도 작은 구릉이 산재하였는데 북쪽의 모래언덕은 1898년 한성전기회사 차고를 건축하면서 허물어졌고 그 서쪽 부근의 구릉 위에는 다수의 초가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모래언덕은 1915년 조선약학교 및 1917년 동대문소학교 설립 때 허물어졌고, 그 흙들은 이 부근의 발전과 더불어 훈련원광장에 살포되었고 종로의 개수 때 성토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청계천은 도성 문화의 중심지로서, 생활터전으로서도 그 역할을 다하였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각종 문화는 다리에서 행한 답교놀이와 편싸움·연등행사 등이 성행하였고, 생활터전으로서는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하층민과 거지들의 거주지로서, 개천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던 아낙네들의 빨래터로서, 어린이들의 목욕장소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19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 장면]

 

(2) 경성부시대

<경성부시대(1960년대 청계천의판자촌)>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침입과 조선 내부의 급진적인 변화로 자주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총칼을 앞세운 상태에서 조약을 체결하였고, 식민지로 전락된 후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서울에서 서구 열강들과 동아시아의 중국 및 일본이 주로 거주하였던 곳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 남쪽 일대와 서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그 북쪽 지역은 조선의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 남쪽은 외래문화가 정착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후 일제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헐어버리고 조선총독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청계천을 경계로 한 문화의 양극현상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 생계를 위해 농촌을 떠나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청계천 제방을 중심으로 무허가 건물을 짓고 생활하였다. 특히 광교에서 수표교 사이의 청계천 남쪽지역은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하천변의 인구 증가는 하천의 오염을 가중시키고, 생활하수의 무단 배출로 인해 여름이면 하수가 주거지로 역류하여 전염병 발생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변 위에 누상가옥을 짓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이들은 홍수 때면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일제는 영원한 조선 지배를 위해 청계천을 하수도 기능으로 전락시키고, 홍수로부터 일본인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1918년부터 청계천과 그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당시 준설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청계천 남쪽 일대의 지류에 집중되었다. 예를 들면 청계천지류 이외에는 용산의 만초천 일대에 대한 개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당시 주요 역점사업은 청계천 분류의 복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청계천 자료들을 개거식 또한 암거식으로 개수함으로서 1918년부터 1937년까지 서울시내에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추진한 하천 개수현황은 총 연장 22만 5,024m이며, 이 가운데 암거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10만 6,629m, 개거식으로 개수된 것은 11만 8,329m이다.

청계천 본류에 대한 복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37년부터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 한 축을 담당하던 때였으므로 조선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나아가 서울을 대륙 침략의 중심적 병참기지로 육성하고자 하던 때이다. 따라서 군수물자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교통로의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도성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도로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7년부터 광화문우체국 앞의 대광통교에서부터 청계천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류되는 삼각지점인 광통교까지 복개공사가 추진되어 1942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이후 나머지 구간에 대한 복개와 개수공사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전쟁이 패망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복개 되기전의 청계천 주변의 목조건물]


(3) 서울특별시시대

복원전의 청계천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시 하수로는 거의 방임상태였으며 하수로 유지사업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상태였다.

이어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참화를 당하였고, 12,400m의 하수로 시설도 피해를 보았다.
청계천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를 전후하여 근 10년간을 방임상태로 두어 토사의 매몰이 극심하였다. 이에 1949년에 광교에서 영미교까지 연장 13㎞를 3개 공구로 분할

하여 9월 30일 동시에 하도 개수공사를 착수하였으며, 1950년 3월 중에 준설을 완료하여 계획하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해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되었으며, 1950년 170만명이었던 서울시 인구가 1951년에는 불과 60여만명에 이르러 계획적인 하천 개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3년 환도한 이후에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적으로 하천정비와 복개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에는 5,256만환을 투입하여 청계천을 포함한 하수도 개수를 추진하였고, 1955년에는 광교상류의 135.8m의 청계천 암거공사를 실시하여 일제강점기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첫 번째 복개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 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 완공하였다. 당시의 청계천 복개공사는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까지 시내 한복판을 가로 흐르는 길이 2,358.5m, 폭 16∼54m의 청계천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였다. 간선도로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청계천 복개도로는 서울시정이 이룩한 건설사업 중 획기적인 성과의 하나였다.

이 방대한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총 16억 6,170만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 24만 2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 공사는 약간의 기자재를 제외하고 모두 국내 자재로 충당하여 국내 기술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 복개공사의 완성으로 위생상의 해는 물론 도시미관상 수도의 면모를 크게 손상시키던 청계천이 말끔히 지하로 들어가고, 깨끗한 복개도로가 중요 간선도로의 역할을 담당하여 시내 교통난완화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복개도로 연변에 거대한 건물인 세운상가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서울시내에서 새로운 상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복개된 청계천 고가교 모습]

그 후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의 구간이 복개되었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마장철교 부근의 복개지에 조성된 주차장 견인소에서부터 중랑천과 합류되는 지점까지는 복개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다. 복개된 청계천의 위생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청계천 양안에 차집관거 공사를 1984년에 착공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수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하수도 재정비사업이 실시된 바 있다.

청계천에 대한 복구공사가 완료된 이후 복개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상가가 밀집하고,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진행하는 새로운 도로의 신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도로 위에 새로이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다. 서울시내에서 고가도로가 제일 먼저 가설된 것은 1968년에 준공된 아현고가도로이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아현 고가도로 건설의 경험을 살려 청계고가도로 공사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8월 15일 공사에 착공하여 1971년 8월 15일 완성되었다. 총 연장 5,650m에 도로 폭이 16m인 이 도로는 지금까지도 서울시내 중요한 교통로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상판 보수공사 등을 단행하여 안전성을 보강하였다.
오늘날 청계천 복개지역에는 도로 양편에 군소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각종 공구상가들과 고서점·세운상가·황학시장·광장시장·동대문상가 등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인파가 몰려들고 있다.



청계천은 인왕산과 북악, 그리고 남산 등 서울의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세 산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류하여도 동대문 밖으로 흘러나가고, 성 밖의 성북천과 정릉천이 다시 합류되어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도성 안의 청계천 지류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도시화 과정에 따라 대부분이 복개되거나 매립되어 그 자취를 살펴보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대부분 청계천을 의미하는 개천으로 표기되고 있어 그 지류에 대한 역사를 더듬는 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행히 도성 안의 개천에 대한 기록들이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등에 일부 나와 있고, 고지도 등에 도성의 하천 지류와 교량 등이 표시되어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합성하면서 역으로 하천 지류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만 청계천 지류의 이름은 모두 나타나고 있지 않은 까닭에 『한경지략』에서 서술하고 있는 하천명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며, 알 수 없는 지류는 교량만을 논하고 설명에서 제외하였다. 조선후기 사료에 기록되었거나 교시되어진 도성 안의 교량 수는 모두 255개로서 중복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당시 서울에 산재해 있던 교량은 도성 안에 76개, 도성 밖에 10개로 모두 86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중 다리의 위치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69개 뿐이고, 교량의 위치는 파악되지만 이름을 알 수 없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17개나 된다.




복원된 청계천의 모습 청계천을 햇볕,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이 흐르는 본래의 하천으로 복원하며, 수중과 수변에 생물의 서식여건을 만들고 생태공간을 조성한다.
청계천 복개구조물과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복개구조물 내에 있는 각종 시설물이 이설되며, 또한 하수관도 정비된다. 철거과정에서 발생되는 약114만톤의 폐기물은 75%이상 재활용처리된다. 복원된 청계천 양측에는 편도 2차로씩 도로가 건설되고 청계천 남북연결에 필요한 교량이 설치될 뿐만 아니라, 하천 둔치에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조서오디어 시민들이 즐겨찾는 여가, 휴식공간이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문화 복원
600년 고도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교, 수표교 등 역사유적을 복원하고 이를 서울 성곽, 5대궁궐 등 4대문안 문화유적들과 연계, 관광자원화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된다.
또한 수표교 다리밝기,편싸움, 연등행사등 전통문화가 수변에 조성될 조경공간에서 재현된다. 역사문화가 살아있는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청계천은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서 뿐만 아니라 서울시민의 자랑스런 휴식공간이 될 것이다.

경제활성화
청계천복원 이후의 주변 지역개발에 대비하여 서울도심부 전체 도시계획, 청계천 주변 도시관리계획, 블록별 세부계획 등을 재검토한다.
도시계획 관련분야는 난개발 방지를 위해 청계천 주변의 현황 및 문제점 등을 파악한 후 기존계획 및 수립중인 관련 계획을 검토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이 과정에서 청계천 주변개발의 기본방향이 설정되고 토지이용계획수립, 개별 건축계획 기준 등이 함께 마련 될 것이다.
(출처: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2002)